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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춘추] 아다다의 침묵 (원우현)(2009/4/15)











우리 학회의 고문이신 원우현 교수님께서 매일경제신문에 칼럼을 기고하셨습니다. 함께 나누고자 소개해드립니다.


 


[매경춘추] 아다다의 침묵



















`꽃가마에 미소 짓는 말 못하는 아다다여.`

나애심의 백치 아다다를 들은 지도 까마득하다. 1956년 영화 속의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내면에 고여 있는 사연을 울컥하며 내뱉고 가슴에 막힌 체증을 풀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침묵이 금이고, 입 다물면 본전이라는 사회 분위기가 답답해 어디론가 벗어나고 싶었다.

요즈음 확성기로 온 동네를 진동시키는 집단의 외침과 멱살 잡고 표현을 남발하는 국회, 때마다 머리띠를 두르고 전열에 이름을 올리는 소위 각계 대표들 등, 표현의 자유가 홍수처럼 몰려와서 보통 사람의 귀는 떠내려갈 지경이다. 그래서 1960년대 미소 짓고 말 못하는 아다다의 침묵이 그리워진다. 의사 표현의 홍수와 가뭄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이 시대에 별 아래 울며 새는 검은 눈의 아다다 모습을 다시 찾게 된다.

일전에 언론법학회 종합토론에서 사이버 모욕죄에 관해 열띤 토론이 있었다.

음란물의 경우와 같이 보호 대상이 아니며 피해자의 권익 보호가 우선이라는 찬성 입장과 기본권은 존중되며, 모욕성의 선별이 어렵고, 사업자의 모니터링 의무는 사전 검열이라는 반론. 찬반의 공방을 지켜보면서 나는 오히려 아다다의 애절한 절규가 떠올랐다.

아다다는 표현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의 대명사다. 아무도 그들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 찬반이 오갈 만큼 표현의 공간도 없이 무시당하기 일쑤인 표현 소외계층의 사람들을 아다다는 대신 노래한다.

`소리 높이지 못하나 하늘은 나의 소리를 들으시네. 많은 말로 아니 한다 하여도 하늘은 알지 못하심이 없도다`를 쓴 송명희 시인. 그녀는 목과 몸을 가누기 힘든 몸으로 우리들의 삶의 숨소리까지 전해주는 시를 쓰고 있다.

표현의 통로와 표현 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은 송 시인처럼 하늘을 바라보고 위로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보다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가 되기 위해선 표현 사각지대에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사람들이 목소리에 관대하고, 그 공론장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바닥에 온몸을 내동댕이쳐도 표현이 잘 안 되는 번뇌` 송 시인 글이 언론법학회의 철우언론법상 서문에 써 있다. 아다다와 같은, 표현의 소외계층을 위해 표현의 자유를 신장시킨 언론학이나 법조계에 수여하는 철우상은 해마다 아다다의 침묵을 대변할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고 있다.

[원우현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기사원문 : 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9&no=225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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